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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칼럼/유오성의 '덕력이국력'

[덕력이국력] 달리기와 밀당하는 여자

by 한국경제TV 2020. 5. 21.

2030세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SNS는 인스타그램이다. 인스타그램을 조금만 둘러보면 멋진 배경을 무대로 달리기하는 사진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달리기가 언제 이렇게 유행을 선도하는 트렌드가 됐나 싶을 정도다. 일각에선 이런 현상을 허세와 과시욕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허세면 어떤가. 달리기는 즐겁고 무엇보다 건강을 지켜주는 최고의 운동이다.

달리기 행사를 전문으로 기획하는 굿러너컴퍼니의 이윤주 대표는 자신이 좋아하는 달리기의 매력을 다른 사람들도 느껴봤으면 하는 바람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말 그대로 ‘달리기 덕후’의 마음이다. ‘올바른 러닝문화의 확산’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달리기를 같이 즐겼으면’ 하는 소망이 이 대표가 바라는 전부다.

 

(▲ 사진 = 이윤주 굿러너컴퍼니 대표)

◆ 달리기에 빠진 `러닝초보자`

체대출신은 아니다. 그렇다고 어릴 적 그 흔한 육상부원으로 활동해 본적도 없다. 대학교에선 프랑스어를 전공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디자인을 공부하겠다며 영국으로 건너갔고 그 곳에서 3년 간 백화점 뷰티매장에서 근무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선 외국계 기업에서 비서로 또다시 3년 간 일했다. 달리기와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온 셈이다.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며 나름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마음 한 편이 공허했다. 공허함은 스트레스로 이어졌고 빈 마음을 채우기 위해 하루하루 술로 지새웠다. 하지만 그 때 뿐이었다. 때 마침 눈에 들어온 게 북한산이었다.

“제가 한국에 돌아와서 구파발 역 근처에 살았어요. 자연스럽게 북한산이 눈에 보였죠. 처음엔 하천 같은 곳을 달렸어요. 그냥 스트레스를 잊고자 달린 거죠. 평지에선 달리고 언덕이 나오면 걷고 그랬죠. 그런데 점점 달리기에도 재미가 붙더라고요. 산이 가까워 산으로도 뛰었죠. 4개월 동안 정말 매일 달렸던 것 같아요.”

무료했던 삶에 이유가 생겼다. 퇴근시간이 기다려졌고 하루도 빠짐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기에 자신감이 붙으면서 ‘대회를 나가볼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달린지 불과 4개월 만에 제주국제트레일러닝대회 100km 코스에 참가했다. 3일간 제주의 구석구석을 달리며 달리기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다. 이 때 만난 사람들이 사업 밑천이 됐다. 지금 함께 일을 하고 있는 동업자도 여기서 만났다. 이 재미를 계속해서 느끼고 싶은 마음에 사업에 뛰어들었다.

 

(▲ 사진 = 살로몬 트레일러닝 아카데미, 굿러너컴퍼니 제공)

◆ 절박함이 만들어 낸 브랜드 전문가

지난 2014년 11월 이 대표는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자신이 기획한 달리기 대회를 여러 스포츠 브랜드를 대상으로 제안서를 제출하는 형식이었다.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처음엔 퇴직금을 쪼개서 사업을 시작했어요. 금방 사정이 좋아질 거라고 믿었던 거죠. 그런데 사업을 시작하고 8개월 동안 직원들 월급조차 주지 못해 다들 힘들었죠. 인맥도 아카이브도 없는 신생 에이전시에 일감이 넘친다는 건 사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 거죠.”

좌절하긴 일렀고 그럴 때 일수록 그녀는 더 탄탄한 기획서를 만들어 기업체에 제안을 넣었다. 상황은 의외의 곳에서 풀렸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 대표는 다양한 대회와 여러 크루(공통의 목적을 위해 모인 사람들)에 참여해 왔다. 그 곳에서 함께 달리기를 하던 지인이 국내 패션 대기업에서 ‘살로몬’이라는 브랜드를 새로 들여오면서 관련 이벤트를 구상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려준 것이다. 이 대표는 자신의 특기인 프랑스어를 살려 살로몬과 관련된 자료를 번역하고 분석했다.

얼마나 절박했냐면 살로몬과 관련된 정보를 다 번역했어요. 아마 국내엔 살로몬에 대해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었을 거에요. 제안서를 들고 가니 담당자들도 이런 정보들을 어떻게 찾았냐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 분들보다 더 많이 아니까 자연스럽게 저한테 그 일이 맡겨지게 된 거죠.

기회가 왔고 놓치지 않았다. 6개의 제안서를 만들었고 그 가운데 살로몬 브랜드를 달고 트레일러닝 국제대회를 나갈 선수를 뽑는 기획이 통과됐다. 30명의 참가자를 모집해 2박3일 동안 프로선수에게 트레일러닝을 쉽고 안전하게 즐기는 운동법을 배우고 매일 30km를 달리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여기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남녀 1명이 국제대회에 나가는 자격이 주어졌다. 대회 참가자들은 이 기획을 러너의 눈높이에 맞춘 프로그램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다음해 살로몬 측과 재계약에 성공했고 이 행사가 발전해 만들어진 형태가 ‘살로몬 트레일러닝 아카데미’다. 트레일러너 입문자 사이에선 반드시 거쳐야 할 코스로까지 자리 잡았다. 지난해에는 30명 모집에 500명이 몰릴 정도로 인기가 치솟았다.

◆ 러너와 참가자 모두가 즐기는 축제

이 대표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달리기 에이전시를 표방하지만 이 대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달리기를 바랐다. 살로몬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한 가지 재밌는 실험을 기획했다. 경쟁에서 오는 성취감이 아닌 달리기 본연의 즐거움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방향을 고민했다. 그렇게 나온 대회가 ‘여의도 한강 릴레이마라톤대회’다. 소규모로 진행된 이 대회는 7명이 1팀을 이뤄 릴레이 마라톤을 하는 형식이다. 정원은 100팀으로 제한된다. 올 때와 갈 때의 길이 다른 기존 마라톤과 달리 정해진 구간을 반복해 달린다.

재밌는 점은 주자들이 바톤을 주고 받는 중간 지점에 자연스레 만들어진 응원지역이다. 이른바 허세존이라고 명명된 이 지역은 달리지 않는 나머지 주자들이 모여 달리는 사람을 응원한다. 동료들의 응원하는 목소리에 주자들은 없던 힘도 쥐어짜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달린다. 응원전도 치열해 현수막을 들고 오기도 하고 어떤 팀은 코스프레 분장을 하고 경기에 참가한다고 한다. 말 그대로 러너와 응원자 모두가 즐기는 축제 한마당이 되는 것이다.

“저희는 매년 스페인 제가마(Zegama)라는 마을에서 열리는 트레일러닝 대회를 가요. 바르셀로나에서 700km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열리는 이 대회를 보기 위해서 응원객이 2만 명이 몰려요. 달리는 사람은 고작 400명 밖에 안 되는데 말이죠. 응원객들은 러너들이 지나갈 때마다 크게 박수를 쳐줘요. 러너들은 그 사이의 산길을 달리고요. 그런데 이 대회의 백미는 1등이 들어올 때가 아니에요. 마지막 주자가 피니쉬 라인에 들어왔을 때 비로소 샴페인을 터트리고 축제가 시작되는 거죠. 너무 감동인거죠. 저와 동료들은 이런 대회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 사진 = 스페인 제가마 트레일러닝 대회, 굿러너컴퍼니 제공)

◆ "러너의 시각에서 바라본 대회가 필요"

SNS를 타고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달리기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었지만 아직까지 국내 달리기 환경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기업과 언론기관에서 주최하는 대형 마라톤 대회의 경우 달리는 러너의 시각보단 주최 측의 편의대로 대회를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국내 마라톤 대회는 해외 대회에 비해 특색이 없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마니아들 사이에서 흘러나온다.

특히 최근엔 스포츠 브랜드 간 마케팅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비슷한 행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내용이 진부하다보니 러너들도 점점 흥미를 잃게 되고 참가자들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이 대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러너들의 시각을 충분히 반영한 시민마라톤대회가 활성화 되는 게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취지에 맞는 마라톤 대회가 열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돈이나 브랜드 노출을 목적으로 한 행사가 아니라 러너들이 달리기를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대회를 만드는 거죠. 내용이 뻔하다 보니 사람들이 줄어들고 러닝시장 자체도 줄어드는 것 같아요.

이 대표의 궁극적인 목표는 러너들이 중심이 된 대회들을 기획하고 만드는 일이다. 지난 6월 600명이 참가한 하이원 스카이러닝 대회는 그 일환이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느낄 수 있도록 코스를 배치하고 달리는 내내 응원을 받을 수 있게 만들었다. 피니쉬 라인을 통과한 참가자 모두를 수건으로 덮어주고 메달을 걸어줬다.

“대회에 참가한 모두가 내가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느끼게끔 만들고 싶었어요. 또 응원하는 사람들도 러너들의 모습을 보고 ‘나도 다음엔 달리겠어’ 라는 마음을 갖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죠.”

◆ 나와 일 사이의 `밀고 당기는 관계`

좋아하는 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마냥 행복할 수는 없다. 사업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있어서다. 직원들 월급을 제때 챙겨줘야 하고 다음 사업을 위한 입찰에도 신경 써야 한다.

눈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정신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표는 달리기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과 비슷한 것 같아요. 언제까지나 열정에 불타오를 수만은 없죠. 다만 달리기와 관련된 사업을 하는데 달리기가 싫어지면 안 되니까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이를 위한 밀당은 필수죠.

한국경제TV 유오성 기자 osyou@wow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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