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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메이커스] 北에서 온 공대생, 3D프린터 들고 중국 간 사연

by 한국경제TV 2020. 7. 24.

대학생이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그런데 그의 무대는 국내가 아닌 중국이다. 대학생 스타트업이 해외로 진출한 것도 놀랍지만 그에겐 삶과 죽음을 넘나든 놀라운 이야기가 숨어있다.

 

◆ 생사의 경계를 넘어

평양에서 남서쪽으로 40km떨어진 남포특별시. 항구 도시이면서 북한의 군 공업지대인 이 곳은 김여명(24, 한양대 기계공학과)군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다. 김 군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그의 아버지는 공업대학을 졸업했지만 출신성분이 낮다는 이유로 중책을 맡지 못하고 평생을 노동자로 살았다. 한국에선 상상하기 어렵지만 가난 때문에 결국 김군은 초등학교를 그만둬야만 했다.

“북한에선 학생들에게 준비물을 요구해요. 수업에 필요한 준비물이 아니라 벽돌이나 식량 같은 거예요. 준비물을 못 가져가면 수업에 필요한 물을 길러요. 저는 집이 어려우니 준비물을 못 가져갔고 수업대신 물을 기르러 다녀야 했죠. 배우는 게 없으니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어요.”

자식들의 앞날이 걱정된 김 군의 부모님은 더 나은 환경을 찾아 탈출을 결심했다. 15년 전 겨울, 그의 가족들은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넜다. 아무것도 모르는 김 군은 두 살 어린 동생 손을 잡고 아버지의 등 뒤를 따랐다. 가족 4명 모두 무사히 대한민국 땅을 밟았지만 가난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에 와서 생활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어요. 경제적으로 어렵다 보니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셔야 했고 저는 제 동생을 챙겨야 했죠.”

새터민이 정착하기에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가족들은 서로를 의지했다. 그의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면서도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그도 부모님 영향을 받아 혼자서 공부해 한양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노력의 대가였는지 지금은 형편도 많이 나아졌다. 그의 아버지는 현재 서울의 한 대학에서 북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흙으로 망원경 만들던 소년...3D프린터에 꽂히다 

김 군은 어렸을 적 만들기를 좋아했다. 공대에 진학한 이유도 내손으로 직접 물건을 만들어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때마침 4차 산업혁명 열풍이 불면서 교육 현장에 3D프린터 보급이 이뤄졌다. 2년 전 창업 수업에서 만난 3D프린터에 김 군은 완전히 꽂혀버렸다.

“북한에 있을 때 놀거리가 없다보니 혼자서 장난감을 만들면서 놀았어요. 두꺼운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배를 만들기도 하고 찰흙을 뭉쳐서 망원경을 만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3D프린터는 제가 깎고 다듬으며 어렵게 만들던 것들을 너무 쉽게 구현해 낼 수 있는 거에요.”

3D프린터를 활용한 창업 기회를 엿보던 그는 지난 2016년 한양대 창업지원프로그램을 통해 중국 염성시를 가게 됐다. 한 달 동안 시장조사를 하며 그는 중국에서 개인용 3D프린터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 해줄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것을 보고 중국에서 창업을 결심했다.

“3D 프린터의 경우 베이징, 상하이, 선전 등 일선도시에선 활성화 됐지만 지방은 아직 보급이 되지 않았어요. 제가 있던 염성시도 대학에 3D프린터가 딱 1대 밖에 없었어요. 심지어 10년 전에 구입한 거였죠. 학생들에게 3D프린터에 대해 물어보니 사용하고 싶어도 기계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 과학상자로 만든 3D프린터

중국에서 돌아온 김 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과학상자를 뜯어보는 일이었다. 과학상자는 구멍이 뚫려 있는 얇은 철판과 나사를 활용해 원하는 모양을 조립할 수 있는 교구인데 그의 마음속엔 어린 시절 형편이 어려워 이를 가지고 놀지 못했던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친구들은 과학상자로 대회를 나가거나 자기가 원했던 물건을 만들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과학상자가 비싸다 보니 사서 쓰지는 못했어요.”

조립이 쉬운 과학상자의 특성상 외관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모터였다. 3D 프린터는 정보 값을 받은 모터가 자동으로 움직이며 출력하는 원리인데 모터와 프레임이 최적화된 상태가 아니다보니 균형이 맞지 않거나 프레임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도 했다. 모터에 딱 맞는 규격을 찾기 위해 수치를 조정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자꾸 문제가 발생하니까 처음엔 정말 어려웠어요. 문제 해결에만 6개월이 걸렸죠. 그래도 이걸 만들면서 3D프린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원리에 대해선 박사가 됐죠.”

김 군이 만든 3D프린터는 기존 제품에 비해 세 가지가 좋아졌다. 조립 과정이 없으니 가격은 내려갔고 플라스틱이 아닌 철로 이루어져 내구성은 높아졌다. 또 마음대로 크기를 늘렸다 줄일 수도 있다. 직접 조립하면서 3D프린터의 작동 원리를 배울 수 있는 건 덤이다.

과학상자를 만들었던 제일과학 측에서도 김 군의 3D프린터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김 군과 비슷한 고민을 하던 제일과학의 서보창 대표는 저렴한 가격에 자재를 공급하기로 했다.

기술이 무르익자 그는 3D프린터 전문업체 '몰던'을 창업하고 중국으로 넘어갔다. 운도 따랐다. 염성에서 인턴을 했던 시기에 만난 창업 지원 기관인 르호봇과 인연이 닿아 사무실과 거주 공간을 제공받았다. 몰던은 중국 진출 첫해 염성 외국인학교에 20개의 3D프린터를 보급했고 교육 수업을 도맡았다.

“재밌는 게 과학상자로 3D프린터를 만드니까 학생들이 친근해 해요. 또 실제로 작동을 하니까 신기해하기도 하죠.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다음 학기 수업은 언제냐는 질문이 왔을 때에요.”

 


◆ 마음껏 꿈꾸고 실습하는 기술학교

지난 3월 김 군은 중국에서 첫 사업을 마치고 잠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성과를 정비하고 다음 사업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올해는 보다 많은 중국 내 교육기관에 3D프린터를 보급할 계획이다. 중국 현지에서 3D프린터를 교육할 인력도 충원한다.

“기술학교를 중심으로 진출할 계획이에요. 대학 특강도 준비하고 있고요. 염성같이 작은 도시에선 3D프린터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많아요. 중국에서 제가 할 일이 많아요.”

잘 살고 싶은 마음에 창업에 뛰어들었다는 김 군. 아직 원하는 만큼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만든 3D프린터가 인정받으면서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자신이 만든 3D프린터가 다른 사람들에겐 보다 쉽게 꿈을 이뤄줄 도구가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어렸을 땐 과학상자가 비싸서 옆에서 구경만 했고, 대학에 와선 이론 수업만 들어야 했어요. 3D프린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에요. 사업이 성공하면 만들고 싶은 걸 마음껏 만들 수 있는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THE메이커스'는 기술을 활용해 스스로 만들어내는 창작자, 장인 등 메이커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한국경제TV 성장기업부 유오성 기자
osyou@wow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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