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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칼럼/이성경의 '힙(HIP)한경제'

[힙한경제] `TV는 멍청하고 VOD는 똑똑하다?`

by 한국경제TV 2020. 5. 20.

필자는 1970년대에 태어난 X-세대 이다. 주윤발과 서태지를 보며 10대를 보냈고, 드라마 모래시계를 통해 비로소 `5월 광주`를 온몸으로 받아 들인 본격적인 영상 세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5~6살 무렵 14인치 흑백 텔레비전을 처음 접한 이후 40여년 간 TV를 보는 것은 늘 `죄책감`이 따르는 행위였다. 어른들로부터, 전교 1등 범생들로부터, 겁나게 멋진 대학생 오빠들로부터 "TV는 바보상자야.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죄악이야. 성공하는 사람들은 책을 읽어"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들었기 때문이다.

 

◇ "TV 보며 시간 보내는 건 죄악이야"

윈스턴처칠 같은 세계사적 인물부터 빌 게이츠 같은 혁명적 천재까지, 위대한 사람들은 정말 책벌레 였다. 이 흔들림 없는 팩트 앞에 TV는 또다시 주눅들었다. 기자가 된 뒤 만난 대부분의 잘 난 사람들도 재레드 다이아몬드와 피케티는 논하되 TV 드라마 얘기를 하면 손을 내저었다.

우리나라만 TV를 바보상자 라고 부른 것이 아니다. 전 세계인이 소파에 앉아 포테이토칩을 씹으며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조롱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21세기 중국 황제 시진핑은 미국 정치드라마 <하우스오브카드>의 광팬을 자처했다. 대학 나온 엘리트들은 미국 HBO의 <왕좌의 게임>을 보기 위해 금요일 저녁부터 집에 틀어박히기 시작했다. 이들은 "TV를 본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들은 `VOD(동영상)를 몰아 본다(Binge).`

◇ "TV 보지 않아요. VOD를 몰아봐요"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하지 않으면 당신은 시대에 뒤쳐진 사람이다. 내 주위에도 `유튜브 프리미엄에 가입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에 빠졌다`는 친구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평소 TV에 시큰둥했다.

이 같은 극적 변화는 어쩌다 생긴 것이 아니다. 지난 10여 년간 시장과 타깃이 격동한 데 따른 경제적 현상이다.

콘텐츠를 내보낼 창구가 지상파 방송국 몇 개에 불과하던 시절에는 프로그램이 성공하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규모의 시청자를 확보해야만 했다. TV 광고는 특정 소비자가 아니라 전 시청자를 대상으로 해야 했고, 코미디는 누구나 웃을 수 있는 소재여야 했다.

하지만 프로그램 송출 창구가 조금씩 늘어나더니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등장으로 이제 콘텐츠 송출은 무한대로 자유로워 졌다. 만드는 대로 내보낼 수 있는 시대에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은 꼭 찾아보는` 차별화된 상품이 효과적이다.

미국 드라마는 유료채널 HBO의 <소프라노스>를 시작으로 점점 더 지능화되고 복잡해졌다. 이후 스트리밍서비스인 넷플릭스는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을 다룬 <나르코스>, 워싱턴 정가의 민낯을 드러낸 <하우스오브카드> 등 극히 제한된 계층을 겨냥한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엘리트 시청자들은 환호했다. 광고주들도 구매력 있는 소비자가 모여있는 지적인 콘텐츠를 선호했다. 바보상자 TV가 지능형 영상콘텐츠(Intelligent TV)로 대체된 것이다.

 

◇ 페이스북 "지금은 유튜브 예요."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약진은 실로 놀랍다. 한때(?) 소셜미디어 최강자였던 페이스북은 `타도 유튜브`를 내걸고 모바일에 최적화된 세로화면 영상플랫폼 IGTV를 6월말 내놓았다.

필자는 최근 IGTV 서비스 내용이 궁금해 페이스북 측에 물어봤다. 당시 페이스북 담당자의 말이 걸작이었다. "지금은 유튜브 예요. 유튜브의 시대가 언제까지 갈지 아무도 몰라요."

비로소 TV 보는 행위가 정당화 됐다. 40여년간 내 정신을 병들게 하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던 TV. 이번 주말에는 똑똑한 동영상을 `보지 않고` 마구마구 `몰아보기(Binge`)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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